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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부정공>양벽정중건상량문(漾碧亭重建上樑文)
漾碧亭重建上樑文 猗歟江山擅佳麗於輿地奐然棟宇筮大壯於羲經玆因後孫之肯堂寔爲君子之爰處伏惟昇平府北梅雨村西亭建漾碧襟帶廣川地不因荒可頌顔樂之賛民知助役肆興澤門之謳豈曰偶然盖有待也施爲綢繆皆從竹圃之美規經費排分亦有斗粟之義務觀水有術依舊流於庭前題石增光至今傳於檻外數里明沙隔岸而暎帶百日紅卉繞砌而流芳醉岩倚壁乃知托意而寫眞黨錮滿廷先占妨賢而致禍勝槩無窮而最稱八景釋菜爲禮而併祀五賢坐誦中庸可察鳶魚之至樂行無外慕宜尋鷗鷺之宿盟遠方自來都是勝友佳客良夜清談只可霽月光風九曲爲歌有同武夷之精舍三公不換恰似子陵之釣臺杖屢臨焉仰瞻百世之宗匠輪奐美矣乃歌六偉之善謠兒郎偉抛樑東扶桑紅日上嵋쁇東吾道光明如此好恨無今世擇乎中兒郎偉抛樑南高飛賀鷰自江南可愛舊時堂上物差池其羽語喃喃兒郎偉抛樑西天作後山深秀西遙知王子新羅亂將母來留意不迷兒郎偉抛樑北九龜山氣高遮北仰觀中立楊公居講道工夫誰得力兒郎偉抛樑上降衷玉帝昭臨上星緯煌煌拱北辰政爲以德亦無忘兒郎偉抛樑下筮遯高風千載下湛差淵翁戰後遊至今精彩使人化伏垣上樑之後亭礎益堅軒窓增色聞詩聞禮篤於君親之大倫衛正闢邪嚴於華夷之大防 後孫 鍾悳 謹書 양벽정중건상량문(漾碧亭重建上樑文) 의연할사 이 강산은 그 아름다움을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가려냈고 빛나는 이 동우(棟宇)는 대장괘를 「주역」에서 점쳤네. 이로 인하여 후손이 중건하니 군자가 거처할 곳이로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승평부 북쪽 매우촌(梅雨村) 서편에 세운 양벽정은 광천을 포용하였네. 땅이 차마 황폐하지 못하니 가히 안락(顔樂)의 찬사를 칭송하고 백성이 역사를 도와 이에 택문(澤門)의 구가(謳歌)를 일으키니 어찌 우연이라 하리오, 대개 기다림이 있어서였네. 치밀한 계획은 다 죽포(竹圃)의 도량에 의하였고 경비의 분배 또한 두속(斗粟)의 의무를 졌네. 물 보는 재주가 있어 옛적과 같이 뜰 앞에 흐르고 이름 새긴 돌이 광채를 더하여 지금까지 난간 밖에 전하네. 펼쳐진 명사(明沙)는 언덕에 맞닿아 번뜩이는 빛을 띠고 백일홍(百日紅)은 섬돌에 둘려 향기를 보내네. 취암(醉岩)이 벽에 기대었으니 이에 뜻을 의탁하고 진상(眞像)을 새긴 줄 알겠으며 당파가 조정에 가득하니 먼저 어진 이를 멀리하고 화를 일으킬 것을 점쳤도다. 좋은 경치가 무궁하니 八경으로 청하고 석채(釋菜)를 예로 하여 五현을 함께 제사 모시네. 앉아서 「중용(中庸)」을 읽으니 솔개와 물고기 「鳶飛戾天魚躍于淵」의 지극한 즐거움을 살피고 행동에 외물을 사모함이 없으니 마땅히 갈매기와 해오라기의 깊은 맹서를 찾겠네. 먼 데에서 스스로 온 사람은 모두 좋은 벗과 아름다운 손이요, 좋은 밤 청아한 이야기는 다만 제월광풍(霽月光風)이면 되겠네. 구곡(九曲)을 노래하니 무이정사(武夷精舍)㉑와 같고 삼공과 바꾸지 않으니 엄자릉(嚴子陵)㉒의 조대(釣臺)와 흡사하도다. 공의 자취 임하심에 백세의 종장을 우러러보겠고 웅장한 정자 모습 아름다우니 이에 六위의 노래를 부르노라. 어영차! 들보를 동편에 밀치니, 東 부상의 붉은 해가 아미산 동편으로 솟누나. 扶桑紅日上嵋東 우리 도의 광명이 이와 같이 좋은데 吾道光明如此好 이 세상에 중용을 선택하는 이 없음을 한스러워하네 恨無今世擇乎中 南 높이 나르는 하례하는 제비 강남으로부터 왔네. 高飛賀鷰自江南 사랑스러워라, 옛날 당 위에 놀던 제비. 可愛舊時堂上物 털같이 하였다고 지지배배 지지배배 差池其羽語喃喃 西 하늘이 만든 저 서쪽 모후산 깊숙한 듯 빼어났네 天作後山深秀西 나는 아노라 신라 왕자 난을 피하여 遙知王子新羅亂 어머니 모시고 와서 머무른 그 뜻을, 將母來留意不迷 北 구구산 기운이 높이 북편을 가렸다 九龜山氣高遮北 우러러 가운데에 선 양공의 거처를 보니 仰觀中立楊公居 도를 익히던 공부 그 뉘가 힘을 얻었나. 講道工夫誰得力 上 정성스럽게 내린 옥황상제가 위에 조림하였다 降衷玉帝昭臨上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북두성을 공배하느니 星緯煌煌拱北辰 정치엔 덕이란 것 잊지를 마오 政爲以德亦無忘 下 좋은 풍경 찾아가신 지 천 년 세월. 筮遯高風千載下 하서 선생 찾던 이곳 연재도 노닐었기에 湛老淵翁戰後遊 오늘날 그 정채가 사람을 감화하네. 至今精彩使人化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한 뒤에 정자의 기초가 더욱 견고하고 처마 끝과 창문이 빛을 더 더하며 시예를 힘써 인군과 어버이의 큰 윤기를 도탑게 하고 정도를 지키고 간사한 것을 몰아쳐 화이(華夷)의 분별을 엄히 할 지어다. 後孫 鍾悳 삼가 씀 註 ㉑무이정사(武夷精舍): 송(宋)나라 성리학자 주자(朱子)가 세운 정자로 이곳에서 제자들과 강(講)을 하였다. ㉒엄자릉(嚴子陵): 여조(餘姚)인으로 본성은 장(莊), 일명은 자릉(子陵). 한(漢) 광무제(光武帝)와 동문수학으로 광무가 왕위에 오르자 성명을 바꾸고 숨어 버렸다. 광무제는 그를 찾아서 가까스로 데려왔지만 자릉은 광무제와 자면서 그의 배위에다 발을 올리는 등 간의대부(諫議大夫)와 같은 벼슬도 버리고 끝내는 부춘사(富春山)으로 돌아가 평생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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